메뚜기·양봉/양봉

양봉 농가 덮친 ‘꿀벌 에이즈’

승명 2016. 5. 18. 12:08

 

● “벌 키우고 싶어도 구할 수 없어요”
● 꿀벌에게 장뇌삼 달여 먹이는 이유
● 지리산에 머루·다래가 사라졌다
● 꿀벌 멸종은 곧 인류의 종말
 

벌의 수분작용이 없으면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 벌이 꿀을 따기 위해 꽃에 내려앉은 모습.

8월10일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마당에 독특한 모양의 벌통 10여 개가 놓였다. 전남 구례에서 온 이성희씨 등 전국 각지의 토종벌 양봉(養蜂) 농민 50여 명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최용수 농촌진흥청 잠사양봉소재과 연구사로부터 ‘낭충봉아부패병’ 예방법에 대해 듣기 위해서다.

‘꿀벌 에이즈’라고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囊蟲蜂兒腐敗病)은 벌의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기 전 말라죽게 만드는 질병. 토종벌(土蜂)과 서양종벌(洋蜂)로 구분되는 꿀벌 중에서 토종벌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강원도에서 발병이 공식 확인된 뒤 무서운 속도로 확산돼 현재 전국 토종벌의 93%가량을 폐사시켰다. 토종벌 최대 산지인 지리산 일대 경남 함양, 전북 남원, 전남 구례 등에서는 살아남은 벌이 전무할 정도. 이성희씨는 “기르던 벌이 지난해 모두 죽었다. 올해 다시 시작하려 했는데 전국적인 품귀현상 때문에 종자 벌을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토종벌은 충북 등 중부 일부 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곳 역시 감염이 확산돼가는 추세다.

문제는 바이러스 질환으로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는 점. 예방조치에 실패해 벌통 하나가 감염되면 전체 벌이 폐사할 때까지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다. 벌통 하나당 3만~4만 마리씩 모여 사는 토종벌 생태에 비춰볼 때, 1000통 이상 벌을 키우는 농민은 최대 수천만 마리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양봉 농민한테 벌은 가축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이름 붙여주고 기르는 건 아니지만 그놈들이 비실대다 죽어나가는 걸 보면 가슴이 무너져요.”

충북 옥천의 양봉 농민 오승환씨는 “벌을 70통쯤 길렀는데 지금은 다 죽고 20통 남았다. 그중 19통도 이미 감염돼 오늘내일 하는 상태”라고 했다. “마지막 남은 한 통에 기대를 걸었는데 요즘 농장에 열흘 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불안하다”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3대째 토종벌을 길러왔고, 토종벌 분야 농민으로는 유일하게 ‘신지식인’으로도 선정된 김대립씨의 충북 청원 농장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한때 1000통 넘게 벌을 기르던 그는 “지난해 9월 감염이 시작돼 이제 350통 남았다. 벌과 함께 자랐고 양봉 전문가라고 자신한 터라 무력감과 비애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있기만 하면 온 세계를 뒤져서라도 약을 구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그는 지난 5월, 중국에 효능 좋은 약재가 있다는 말을 듣고 현지에 다녀오기도 했다. 낭충봉아부패병은 중국, 태국 등에서 오래전부터 유행한 질병으로 관련 분야 연구에서 중국은 우리보다 앞서 있다. 김씨는 “유명하다는 약을 전부 구해 오는 데 1000만원쯤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약들을 희석해 벌통 안에 넣어주고 있다.

장뇌삼 먹는 벌

전국 토종벌 농가들이 지난해 경기도 과천 정부청사 운동장에서 토종벌 장례식을 치르는 모습. 이들은 낭충봉아부패병을 특별 농업재해로 인정하고 피해농가에 보상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벌에게 약을 먹이는 사람은 김씨 외에도 많다. 현재 벌을 갖고 있는 거의 모든 농민이 ‘보약’을 주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꿀벌 에이즈’ 사태를 계기로 만들어진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꿀병질병관리센터가 내놓은 예방법 중에도 “티몰(방부제, 구충제 등으로 사용되는 물질) 150ml와 1000ppm 이산화염소 100~200ml에 홍삼엑기스(진액) 300~400ml, 집에서 먹는 식초 150ml를 섞어 일주일에 두 번씩 벌들에게 주라”는 내용이 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으니 벌에게 좋은 것을 먹여 면역력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충북 옥천의 양봉 농민 김미연씨는 “이 안내문을 보고 바로 6년근 홍삼진액을 사다 먹였다. 가짜를 줬다가 오히려 더 탈이 나면 어쩌나 싶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 제품을 구입했다”고 했다. 김씨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프랑스산 영양제가 좋다는 글을 보고 500g에 7만원 하는 약도 구입해 먹이고 있다고 했다. 농민 오승환씨도 “산에서 영지버섯을 따다가 달여 먹이기도 한다. 벌이 살기만 한다면 뭔들 못 하겠느냐”고 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벌을 살린 사례도 있다. 전남 구례 농민 고인상씨는 지난 6월 낭충봉아부패병 확산 이후 처음으로 종자벌 증식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그가 벌에게 먹인 것은 ‘장뇌삼, 더덕, 곰취, 헛개나무, 오가피, 질경이, 하얀민들레, 산마늘, 달래, 찔레, 복분자’ 등 18개 재료를 섞어 발효시킨 효소. 50년 이상 벌을 쳐온 선배 농민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꿀벌 에이즈’로 모든 벌을 잃은 고씨가 동료 농민들과 함께 다시 양봉에 도전한 건 지난 2월. 두 달간 전국을 돌며 감염되지 않은 토종벌 200통을 구한 고씨 등은 이것을 전남 광양시, 보성군, 고흥군 등 청정지역으로 옮긴 뒤 위의 보약을 먹이며 정성을 다해 키웠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이산화염소와 은나노복합제(colloid silver)를 사용해 소독하는 등 바이러스 퇴치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여왕벌이 일벌들을 끌고 나와 새 무리를 형성하는 ‘분봉’에 성공하면서 애초의 200통이 500통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들은 새로 생긴 300통 가운데 150통으로 육종사업을 계속하고 나머지 150통은 일반 농가에 분양했으나, 이 벌들은 현재 대부분 폐사했다. 전국적인 바이러스 창궐 속에서 벌을 살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