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梁氏) 본관(本貫) 남원(南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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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군이 되었다.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시조(始祖)는 양을라(良乙那)이며 중조 양 탕(良 宕)의 후손 우량(友諒)이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공(功)을 세워 남원백(南原白)에 봉해졌으므로 제주(濟州)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능양(能讓) : 병부공계
주운(朱雲) :
용성군계
수정(水精) : 대방군계
능길(能吉) :
예성군계
를 각각 일세조(一世朝)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때 견(堅)이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책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진현관대제학(進賢冠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二叔薺)라 불렸던 우(祐)가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조선(朝鮮)에서는 관료파(官僚派) 학자로서 세종(世宗)의 총애를 받았던 눌재
성지(誠之)가 유명했는데, 그는 세종(世宗) 때 신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세조(世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연(淵)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
이조판서(兵· 吏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증손 구신(久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였다.
이외에도 희(喜)가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구국전선에 앞장선 대박(大樸)과 홍주(弘澍), 그리고 몽열(夢說)과 황(榥),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형․공조 판서(形․工曹判書)를 역임한 헌수(憲洙) 등이 가문을 빛냈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병장(義兵將) 상기(相基)와 한규(漢奎), 독립운동가로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총사령관을
역임한 세봉(世奉) 등이 있다.
· 병부공계 (兵部公系)
· 대방군계 (帶方郡系)
· 용성군계 (龍城君系)
· 예성군계 (蘂城君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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