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역사/좋은 글, 감동 글

유종원(柳宗元)의 편지

승명 2015. 5. 12. 20:07

답위중립서(答韋中立書) - 유종원(柳宗元)의 편지


이십일 일에
유종원이 아룁니다.
보내주신 글에서
저를 스승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나,
저는 도를 두텁게 닦지 못하고
학업도 매우 천박하여
어디를 둘러 보아도
스승으로 삼을 만한 점이 없습니다.
비록 언론을 좋아하고
글을 쓴다고 해도
스스로 매우 부족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선생이 경사로부터
오랑캐 고장인 영주로 오셔서
다행히도 스승으로 선택하셨으니,
저는 스스로 스승이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설령 스승으로 삼았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스승은 감히 되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스승도
감히 못할 것이어늘
어찌 선생의 스승이 감히 될 수 있겠습니까?
맹자는 “사람들의 폐단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위진시대 이후로는
사람들이 더욱 스승을 모시지 않게 되어
요즈음에는
스승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도 못했고,
또 있다고 하여도 모두가 비웃고
미친 사람이라고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유만은 분연히 유속을 돌보지 않고
비웃음과 모욕을 무릅쓰면서
후진을 불러 모으고
<사설>을 지은 뒤
엄숙한 얼굴을 하고 스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 사람들은 과연 떼를 지어 이상하게 여기며 욕하고
손가락질 곁눈질하며, 서로 사람들을 끌어다
쓸데없는 말만 부풀려 놓았습니다.
한유는 이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장안에 있다가
밥도 익기 전에
황급히 동쪽으로 떠났는데,
이렇게 하기를 수 차례나 하였습니다.
굴원의 부에서 이르기를
“마을의 개들이 떼를 지어 짓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는 사물에 대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듣기는 “용과 촉 지방의 남쪽에는
항상 비가 오고 햇빛나는 날이 드물어
해가 뜨면 개들이 짓는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과장된 말로 여겼었는데
육 칠년전
제가 남쪽지방으로 온 지 두 번째 해
겨울에 큰 눈이 내려
오령 너머
남월의 몇 주까지 덮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여러 주의 개들은
모두 놀라 짓고 물고 하면서 며칠 동안 미쳐 돌아다니다가
눈이 그친 뒤에야 잠잠해졌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전에 들었던 얘기를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한유는 스스로를 촉 땅의 해로 생각하게 되었지만,
선생은 또 나를 남월의 눈으로 만들려고 하니
이 어찌 해가 안 되겠습니까?
더욱이 저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선생 또한 입게 됩니다.
하지만 해와 눈에게
어찌 잘못이 있겠습니까?
본시 짓는 것은 개들일 뿐이나
생각건대 요즈음 세상에
짖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어느 누가 감히 군중들 눈을 돌게 하고 이상하게 함으로써
소란을 불러들이고 분노를 자초하려 하겠습니까?
저는 좌천된 이후
뜻이 더욱 적어지고,
남쪽에서 거처한 9년 동안
각기병이 심해져서
점점 복잡한 일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니,
어찌 떠들썩하게 함으로써
밤낮으로 내 귀를 귀찮게 하고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저는 정말 번잡함에 쓰러져
더더욱 잘 지내지 못할 것입니다.
평소에도 뜻하지 않게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적지 않은데,
더욱이 남의 스승이 되는 데에는 결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듣건데
옛날에 관례를 중시한 것은
그것으로써 성인의 도를 추궁하려고 했던 것이니,
이것은 성인들이 특히 마음을 썼던 일이나
수백 년간
사람들은 다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요즈음 손창윤이란 사람이 분연히 관례를 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예를 치른 뒤
다음 날 조정에 나가
외정에 이르러
홀을 손으로 들어 올리고서는
경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자식이 관례를 행하였소.”라고 말하였으나
응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멍청히 있기만 했습니다.
경조윤 정숙칙이
성을 내면서 홀을 당기고 뒤로 물러나 서서 이르기를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라고 하자
외정의 사람들은 모두 크게 웃기까지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정숙칙을 비난하지 않고 손창윤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왜 그랬겠습니까?
그가 홀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려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선생의 덕행은 두텁고 언사는 깊어
지은 문장이 고인의 모습을 갖춘 듯 넓으니
설사 제가 스승이 된다 하여도
보탤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가령 저로서는
나이가 선생보다 많고
도에 관하여 듣고 문장을 쓰기 시작한 날짜가
조금 이르다 하여,
정말로 선생이 왕래하며 서로의 지식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저는 기꺼이 심득한 전부를 펼쳐 보이겠으니
선생께서 스스로 선택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일은 가능하겠습니다.
만약 시비를 정하여
선생을 가르치는 일은,
저의 재주도 부족하고 앞서 말한 것도 두려워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전에 선생이 보시고자 했던 내 글은
이미 모두 보여드렸지만
결코 그대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선생의 기색을 살펴
진실된 호오(好惡)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보내신 글은 모두 너무 과분합니다.
선생은 분명 허황하게 칭찬하거나 거짓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제 글을 좋아하심이 심하기 때문에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과거 내가 젊었을 적에는
글을 지음에
문사에 기교를 다하였으나,
조금 나이 든 이후에야
문장이란
성인의 도를 밝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문장은 구차히 겉만 아름답고 화려하게 짓거나
문채에 힘쓰고 성률을 과식함으로서
능사를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제가 말한 바는 모두 제 스스로 도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으나,
과연 정말로 도에 가까운지 아니면 멀리 떨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성인의 도를 좋아하여, 제 글을 좋게 보셨으니
혹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매 번 문장을 지을 적마다
감히 가벼운 마음으로 짓지 않았으니
글이 경박하여, 남게 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며,
감히 태만한 마음으로 쉽게 여기지 않았으니
글이 허술하여 엄숙하지 않음을 두려워한 때문이며,
감히 혼미한 정신으로 글을 짓지 않았으니
글이 애매모호하여 번잡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며
감히 오만한 자세로 짓지 않았으니
글을 제 멋대로 하여, 교만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또 억누르는 것은, 글을 보다 심오하게 하려 함이고,
발양하는 것은 글을 명백하게 하려 함이며,
소통하게 하는 것은 글을 통창하게 하려 함이며,
살펴서 짓는 것은 글을 절제있게 하려 함이며,
자극하여 분발시키는 것은 글을 맑게 하려 함이며,
단단함을 보존하는 것은 글을 중후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가 성인의 도를 보좌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서경>에 근본을 두어
질박함을 구하며
<시경>에 근본을 두어
장구함을 구하며
<예기>에 근본을 두어
적절함을 구하며
<춘추>에 근본을 두어
결단력을 구하며
<역경>에 근본을 두어
움직임의 이치를 구하니
이는 제가 도의 근원을 찾는 방법입니다.
또 <곡량전>을 참고하여
글의 기세를 단련시키며,
<맹자>와 <순자>를 참고하여
글의 출로를 트이게 하며,
<장자>와 <노자>를 참고하여
글의 단서를 개척하며,
<국어>를 참고하여
글의 정취를 넓히며,
<이소>를 참고하여
글의 유심함을 다하고,
<사기>를 참고하여
글의 간결함을 밝힙니다.
이는 제가 여러 가지를 널리 참작하고 두루 통찰함으로써 글을 짓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들이
과연 옳은 것입니까?
틀린 것입니까?
취할 것이 있습니까?
취할 것이 없습니까?
선생께서 보신 뒤 선택하여
틈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선생께서 자주 와서 성인의 도를 넓히고자 한다면
선생은 소득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어찌 스승 운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알맹이는 취하고 껍데기는 버리되
남월과 촉땅의 개들의 괴상한 짖음이나 외정의 비웃음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습니다.

 

二十一日,宗元告白:承蒙您屈辱地來信想拜我爲師,我的道德修養不夠深厚,學業也非常淺近,檢點其中,沒有值得別人師法的地方。雖然常常好發表一些言論,寫一些文章,但很不敢自信。想不到您從京師來到這蠻夷之地,我有幸被您認爲可以取法。我自己估量自己,實在並無可取之處,也不敢當別人的老師,當一般人衆的老師我尚且不敢,何況是當您的老師呢?
  孟子曾經說:“人之患在好爲人師。”從魏、晉以來,人們更不去拜老師。當今之世,便不曾聽說有誰要作別人的老師,有這種想法,人們便總是七嘴八舌地嘲笑他,認爲他是個狂人。只有韓愈不顧流俗,頂著世俗的嘲笑和侮辱,收召後輩學生,還寫了《師說》 這篇文章,並態度端正地做別人的老師。世俗之人果然群聚而以爲怪事,紛紛咒罵,添油加醋地汙蔑誹謗。韓愈因此而得到了“狂”的名聲,居住在長安城中,連飯都來不及做熟,便急切地避開別人的誹謗而東去任洛陽令了,象這樣的情形,已經發生不止一次了。
  屈原曾經作賦說:“邑犬之群吠兮,吠所怪也。”我過去聽說庸和蜀地以南的地區,經常下雨,很少見到太陽,太陽一出來,狗便狂叫不止,我當時認爲這樣說有點過份了。六七年前,我被貶來到南方。元和二年的冬天,有幸趕上大雪越過五嶺,覆蓋了南越中的好幾個州。這幾個州中的狗,都倉皇地狂叫著亂咬亂跑,好幾天都是這樣,一直到雪消完後才不叫,這樣我才知道以前聽說的蜀犬吠日的事是真的。現在韓愈既然把自己當成蜀地的太陽,而您又想使我成爲越地的雪,這樣想難道不是令人難堪嗎?不僅我會感到難堪,您也會受到連累。然而,雪和太陽難道有什幺過錯嗎?狂咬亂叫的只是那些狗罷了。您揣度一下今天天下的人能不象蜀地的狗那樣亂咬亂叫的能有幾個人?而誰又敢于在衆人面前顯露自己,而招惹來喧鬧,叫人怒怪呢?
  我自從因罪被貶以來,更加少用心思,在南方住了九年,多了腳氣病,逐漸不喜歡吵鬧,怎可讓那些唠叨不休的人,不分早晚常在我耳邊講些我不喜歡聽的話,來幹擾我平靜的心呢?(此段有少)
  又聽說古時候重視加冠禮,用來要求成人之道,這是聖人所特別注重的禮節。數百年來,世人不再舉行。近來有孫昌胤這個人,獨自下定決心,振奮精神,舉行此禮。行過禮後,隔天上朝,到了外庭,把芴板插入紳帶,向衆官員們說:「我的兒子行完冠禮了。」聽到的人都非常詫異的樣子。京兆尹鄭叔則生氣的放下笏板,退後站住說:「這和我們有什麽關系呢?」廷上的人都大笑。天下的人不去指責鄭叔則行爲的不是,而稱贊孫昌胤作爲的得當,爲什麽?因爲他做了別人不願做的事。現在自命爲師的人,大都和這情形相同。
  你德性孰厚,文辭精深,所寫的文章,都氣勢廣大,有古人風貌,就算我敢當你的老師,又能增長你什麽呢?假如是因爲我的年紀比你大,聞道著書的時候不比你晚,真的想和我交換心情,那我當然願意把所知道的都告訴你,你姑且自己選擇,認爲可取的就采取,認爲不可取的就棄去,這樣就可以了!假如要立下是非來教你,我的才學不夠,又害怕前面所說的,那我是一定不敢的了。
  你先前所想見我的文章,已經全部奉上了,並不是用來向你炫耀的,姑且只是想看看你的反應(態度),真正的好惡如何?現在來信,說得都太過誇贊我了。你當然不是喜歡隨便阿谀別人的人,只是太愛護我才如此罷了。
  從前我年輕時,寫文章,力求文章精妙。長大後,才知道文章是用來闡明聖道的,因此不是隨便以寫的華麗鮮豔,講究辭藻,和聲律的誇飾就認爲是最會寫文章的。以上我所敘述的,都自認爲接近聖道,卻不知果真離道近還是遠呢?你喜好聖道,而肯定我的文章,或許我的文章離道不遠了。
  所以我每次寫文章,從不敢以輕乎隨便的態度寫作文章,害怕文章輕率而沒有思路,害怕文章松散而不謹嚴,從不敢在思路不清的時候寫早,害怕文章不明斷而又雜亂,從不敢以驕矜之心寫作文章,害怕顯現高傲驕狂的意味。
  收斂文辭是要文章含蓄,發揮文理是要文章明晰,疏通文章是要文章暢達,剪裁全文篇章是要文章簡潔;激揚是要文章輕清,凝聚是要文章穩重,這是我用來輔佐護衛聖道的方法。根源尚書,以求質樸;根源詩經,以求恒久;根源禮書,以求合宜,根源春秋,以求明斷,根源易經,以求變化,這是我尋求聖道的根本。參酌谷梁傳,以磨砺文氣,參酌孟子、荀子,以暢達條理;參酌莊子、老子,以活潑思路;參酌史記,以顯精煉,這是我多方推求,融會貫通後,用來寫文章的方法。
  這些意見,到底是對呢?還是不對呢?有可取之處呢?還是沒有可取之處?你姑且看看做一番選擇,閑暇時告訴我。假如急著想要推廣聖道,你沒有收獲,我卻有所得,又何必稱我老師呢?取其實際,不要虛名,免得招惹越蜀的群狗驚怪亂叫,而被外廷的官員譏笑,這樣就最好了。宗元再向你說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