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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승명 2018. 4. 23. 23:41


황광우, 비아북, 2009

 

•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지가 없는 정부는 정부의 자격이 없다. "자유와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정부의 존립 이유이며, 정부가 이를 지키지 못하면 국민은 정부를 전복시킬 권리가 있다"고 혁명권 사실을 가르친 이는 영국의 존 로크였다. 중3 여학생들에게 죄가 있다면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의 가르침대로 길거리에 나선 죄밖에 없다. 촛불 시위의 배후 교사자는 다름 아닌 존 로크였다.[5위대한 생각들]


•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나는 믿는다.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볼 수 없고, 사상이 없으면 세계를 만들 수 없다. 오늘의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청춘의 특권이자 사명이라면 젊은이는 세계를 만들어온 사상들을 외면하고 살 수 없다.[9위대한 생각들]


•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적 변화는 신분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한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지배계급은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성직자였다. 그런데 새로운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을 '시민계급' 또는 '부르조아'라고 부른다. '부르그bourg'란 당시에 새롭게 생긴 상공업 도시를 뜻하는 말이고, '부르주아bourgeois'는 그곳에 사는 상공인들을 의미했다. 새로이 형성된 부르주아의 성격은 우리가 자주 쓰는 '더치 페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의 원뜻은 '네델란드인의 방식대로 한다'인데 지금은 '비용을 각자 부담한다'는 의미로 쓴다. 당시 네덜란드는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상당히 많았다. 이 무렵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프랑스 '촌놈'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암스테르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 외에는 자사를 하지 않는 주님이 한 사람도 없고, 모두 다 돈벌이를 하러 밖에 나가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사람이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다."[17위대한 생각들]


• 그러나 시민계급은 달랐다. 그들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지위가 높아진다 해도 그들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성직자, 귀족 다음의 '제3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자유조차 얻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주아는 점점 더 왕권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시민계급은 새로운 정치체계를 바라게 되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체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원했다. 이 같은 시민계급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다.[19위대한 생각들]


• 살아서는 신의 교리에 따르고, 죽어서는 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삶의 최고 목표였다. 사회생활면에서는 봉건 제후의 영토인 장원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그속에서 개인은 없었다. 단지 '우리'만이 있었을 뿐이다.


문예부흥은 이것을 역전시켰다. '신'이 아니라 '인간'을 찾고, '내세'가 아니라 '현세'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한 예로 문예부흥기에는 전과 달리 개인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개인'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예로 문예부흥기의 이탈리아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리베르타(liberta, liberty)란 단어를 들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갖고 싶은 선물'이다. 이 시대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소망은 자유를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란 개인이 공동체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살 때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20위대한 생각들]


•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사상에서 가장 힘주어 주장한 재산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요구할 수 있는 '개인적인' 자유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유의 개념은 '개인'의 발견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그리고 과학혁명은 인류 정신사에서 '개인'을 찾게 해 준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 사상을 등장시킨 사상적 토대였다.[22위대한 생각들]


•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를 유럽 역사에서는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 또는 절대주의Absolutism시대라고 부른다. 중세에는 봉건 영주가 정치의 중심이었다. 왕은 있었으나 전국을 통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왕은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전국을 통일하고, 행정․ 사법․ 군사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기 위해 신흥 계급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사회계약설'이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The Leviathan》(1651년)에서, 존 로크John Locke는 《정부론Two Treaties of Government》(1689년)에서, 장 자크 루소Jean Jaques Rousseau《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1762년)에서 각각 사회계약이론을 전개했다.[26위대한 생각들]


• 반면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도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자율적이라고 했다. 자연 상태에서 모든 인간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기본권리인 '자연권'을 갖는다. 자유롭게 살 권리, 안전하게 살 권리,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이 세 가지 자연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목적인데, 만일 정부가 이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면 국민은 정부를 교체할 권리, 즉 저항권을 갖는다고 로크는 보았다.


한편, 루소는 로크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국가의 주권은 민중에게 있다는 '주권재민설(主權在民說)을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국가와 군주의 권력이 근본적으로 민중에게 있다는 주장이 확립되었고 왕권신수설은 빛을 잃게 되었다.[27위대한 생각들]


• 스미스는 먼저 모든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생산품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근대 시민계급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든 생산물의 가치가 노동의 산물이라면 재산 역시 노동의 산물이다. 노동한 사람이 그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된다. 따라서 각 개인이 소유하는 재산권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이로써 각 개인의 재산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되고 사람들은 떳떳이 부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29위대한 생각들]


• 그런데 일반의지란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일반의지라는 것이 만들어 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 외에 경제적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루소는 이 문제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국민은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되면,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된다."[35위대한 생각들]


• 대동(大同)은 공자가 돌아가 싶어 했던 동아시아 고대인들의 유토피아Utopia이다. 천하는 왕이나 제후, 대부들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공동재이다. 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사적 관계나 신분에 따라 선발하지 않고, 오직 재능에 따라 선발한다. 가족주의적 편협함은 없다. 다른 사람의 자식들도 내 자식처럼 돌보고, 다른 사람의 부모도 내 부모처럼 봉양한다. 환과고독, 홀로 사는 과부나 홀아비, 고아와 독거 노인의 불우한 삶을 공동체가 보살핀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부끄러워했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것이 '대동'이라 불리는 공자의 유토피아이다. 고대인들의 공동체적 삶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역사의 유물이 바로 가족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동체의 관계가 아직도 가족 안에서는 자연스럽다. 가족적 질서, 그것의 확대판이 공자의 대동이었던 것 같다.[40위대한 생각들]


• "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플라톤의 사회주의는 아마도 선배 철인 피타고라스Pythagoras에서 빌려온 경구인 듯 싶다. 피타고라스는 이탈리아의 크론섬에서 자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로 공동체를 꾸렸다. 요즘의 맥락으로 풀이하면 학문 공동체이기도 하고, 수도 공동체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는 개개인의 사유재신을 완전하게 공유했다. 신과 만나는 정신적 수련생활에서 사유재산을 걸림돌일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했다. 채식을 장려했고 콩류의 음식을 금기했으며 묵언을 기본으로 했다. 공동체의 규율을 어기면 추방된다. 추방되면 공동체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비밀로 해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기면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단, 처음 입회할 때 내 놓은 재산의 두 배를 공동체는 개인에게 돌려 준다.[41위대한 생각들]


• 마르크스는 분명 현대 공산주의의 원조이지만 정작 마르크스가 생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기술한 문건은 거의 없다. 노동자계급의 성경이라 불리는 《자본론Das Kapital》을 다 뒤져도 장차 오게 될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자본론》은 미래에 대한 예언서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자본의 성격에 대한 비판서였다. 나아가 마르크시즘Marxism이란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을 약속하는 공상적 교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 이론이다.[45위대한 생각들]


• ......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못하고 타자의 강제에 의해 일을 하는, 이른바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가 진행되면, 또 노동의 결과물을 자신이 전유하지 못하고 타자에게 수탈당하면 노동자는 노동의 소외에 처하게 된다. 노동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노동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제되는 고역이 된다. 인간이라고 하는 호모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노동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노동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노동의 소외는 곧 인간성의 소외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적 전복을 기도하는 마르크스의 기획은 이처럼 노동의 소외에 기초한다. 노동의 소외가 인간성의 소외를 초래하기에 마르크스는 노동 해방을 인간 해방의 필수전제로 파악했던 것이다.[46위대한 생각들]


• 그런데 중국은 소련과 달랐다. 스탈린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부하린을 위시한 모든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도살장으로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 난 후 스탈린 옆에는 복지부동하는 일단의 공무원들만 남았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혁명가는 한 명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죽이지 않았다. 인민속으로 하방(下放)을 보냈다. 그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그것이 바로 '흑묘백묘론',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피의 실용주의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애햐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으로부터 중국 공산당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구호였다.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이 중요하다.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 무슨 공산주의 타령인가? 이것이 덩샤오핑의 현실 인식이었다. 이후 덩샤오핑의 지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걸아간 개혁, 개방의 길은 레닌이 유시한 국가자본주의 길, 그것이었다.[55위대한 생각들]


• 소크라테스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러분의 명령보다 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내게 생명과 힘이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설교하고 권면하는 철학의 임무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지혜와 진리에 무관심하고 영혼의 발전에 무관심한 태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앞으로 나와 같은 사람을 쉽게 다시 찾지는 못할 것입니다. 익살스러운 표현을 쓰며 나는 한결같이 여러분을 붙잡고, 설득하고, 비난함으로써 여러분을 돕는 일, 신이 보낸 쇠파리(성가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단잠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화를 벌컥 내면서 나를 죽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죽이면 여러분은 평생을 깨어 있지 못하고 잠자면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70위대한 생각들]


•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정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 이념은 많은 왜곡과 굴절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처음부터 단일한 정치 이념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먼저 민주주의는 꽤 역사가 오래된 사상이다. 민주주의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였으니 2,500살도 넘은 사상인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신참이다. 자유주의는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과 시민혁명을 겪으며 탄생한 사상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탄생한 시기가 다르고 내용도 달랐다. 자유민주주의는 이 두 사상의 합작품이다.[73위대한 생각들]


•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열렬히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전까지는 절대왕정과 봉건적 신분제 때문에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시민계급은 개인의 자유를 외쳤다. "우리에게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달라!" "우리의 재산은 우리 노동의 산물이며 정당한 것이니 건드리지 말라" 이런 시민의 기본권과 재산권은 이후 자유민주주의 원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


자유주의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주장했다. 왕권신수설에 따르면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왕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사상가들은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그들은 조목 조목 따졌다. 왕권을 비롯한 모든 권력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 합의에 근거한다는 것, 따라서 주권은 민주에게 있다는 것 등 왕권신수설의 오류를 파헤쳤다. 또 그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그것을 제도화시켰다. 법 앞의 평등, 법에 의한 통치(입헌주의), 국민이 선출한 의회와 그것에 의한 입법(의회제도),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분리(삼권분립)등이 그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자유주의는 시장의 원리와 자유방임 원칙을 주장했다. "경제활동은 시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절되고, 경제는 원활히 운영된다. 따라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할 여지는 없고, 모든 것을 개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다."[74위대한 생각들]


• 자유주의자들이 가졌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재산은 개인의 노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고, 가난한 것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는 가난에 대해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빈곤과 실업의 원인이 몽땅 개인의 태만, 무절제, 협잡 등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구조와 제도가 빚어내는 빈곤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실제로 빈곤의 문제, 빈부의 문제 등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그냥 놓아둘 경우 더욱 심화되어 결국에는 사회적으로 곪아 터진다. 따라서 사회와 국가는 당연히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이를 완전히 방기해 버렸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한계였다.[78위대한 생각들]


• 자유주의는 이처럼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포기되든지 개선되어야 했다. 자유주의에 민주주의가 더해진 것이다. 동시에 고전적 자유주의는 수정되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싫어했다기 보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강제결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78위대한 생각들]


• 루즈벨트의 이런 정책들은 자유방임주의 경제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이제 국민 생활의 전 분야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국가가 밤에 도둑을 지키는 '방망이든 경찰'에서 어떤 일이든지 처리하는 '거대한 거인'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거대한 거인을 복지국가(福祉國家, Welfare State)라고 부른다. 복지 정책의 구체적 내용은 국민의료보험제도, 국민연금제도, 무상의무교육제도, 실업보험제도, 상해보험제도 등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탄생했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를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82위대한 생각들]


• 이렇듯 '네이션'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국가, 국민, 민족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중세 이후, 곧 근대로 넘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비록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인간 집단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을지라도 말이다. 잔 다르크 이야기에 나오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시기의 사람들 사이에는 영국과 구별되는 '프랑스 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어 갔음을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92위대한 생각들]


• 언어와 문학에서도 국민적 통일의 경향이 나타났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가 지식인들의 언어였다. 영국 사람이든 이탈리아 사람이든 책을 낼 때는 라틴어를 쓰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민족언어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4세기에 단테는 이탈리아어로 《신곡 La Divina Commedi》을 썼고, 초서Geoffery Chaucer는 영어로 《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썼다. 그 후 민족어 또는 민족국가의 국어가 점차 문화적 표현수단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로 수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영국인에데 정신적 양식을 제공했다.[94위대한 생각들]


• 영국과 프랑스는 이런 민족주의 과제를 시민혁명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서서히 달성해 나갔다. 그런데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다. 먼저 프랑스 대혁명은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에 비해 더욱 철저히 봉건제도를 파괴했다. 나폴레옹전쟁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 전쟁은 점령국들에 나폴레옹 헌법을 선포함으로써 혁명 이념을 그 나라 국민들 사이에 확산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점령국 국민들 사이에 민족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침략을 받은 나라의 국민들은 힘을 합해 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치단결했고, 그 과정에서 전에 없던 민족 감정이 싹튼 것이다.[97위대한 생각들]


• 신생독립국가를 중심으로 한 제3기의 민족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민족'이 없는 민족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겨졌다. 아프리카의 지도를 한 번 보자. 이들의 국경선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 지배에 편리하도록 그어놓은 경계선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삼아 독립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경계가 민족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99위대한 생각들]


• 파스즘을 하나의 정치사상과 운동으로 정립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정치가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였다.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는 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하나로 묶어 다발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맨 처음 19세기 말에 남부 이탈리아에서 오로지 소요를 일삼는 주민들의 문장으로 사용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선전문구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국민이여, 단결하라!" 호소하기 위해 파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113위대한 생각들]


•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독재체제가 출현했다.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등장했고, 천황(天皇)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바탕으로 일본에서는 군국주의(軍國主義)가 나타났다. 그 명칭과 특성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세 나라의 독재 체제를 한데 묶어 '파시즘'이라고 불렀다. 이는 넓은 의미의 파시즘인 것이다. 지금도 파시스트(Fascist, 영어), 또는 파쇼(Fascio, 이탈리아어)는 독재, 독재자라는 의미로 통한다.[114위대한 생각들]


• "베토벤, 괴테, 칸트를 낳은 독일 민족이 왜 이 같은 히틀러의 광란을 묵인하고 추종했는지, 그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116위대한 생각들]


• 한 미국인이 독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전에 손님은 음식값을 이미 달러로 치렀다. 음식이 나와 맛있게 먹고 식사를 막 끝내려 할 때 식당 종업원이 음식을 또 가져 오는 것이었다. 손님은 음식이 이미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종업원이 대답했다. "알아요. 그런데 식사하시는 동안 또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떨어졌거든요. 하지만 달러의 가치는 변화가 없으니 결국 손님은 음식 값을 더 낸 셈이죠. 그래서 다시 음식을 가져온 것입니다.[120위대한 생각들]


• ...... 그래서 사람들은 성냥 대신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며 오늘 절약했다고 웃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조 마르크짜리 지폐도 등장했다. 물론 그 이후에 경제 상황은 좀 호전되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다시 독일 경제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실제로 나치의 경제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2월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앞으로 4년 안에 완전고용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 그 약속을 히틀러는 지켰다. 1936년 미국의 실업률이 20%였던 데 반해 독일에서는 완전고용을 넘어 일부 분야에서는 노동력 부족현상까지 나타났다. 물론 그 같은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은 결국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도발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극심한 불황과 실업에 시달리던 당시 독일인들에게는 긴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121위대한 생각들]


• 인류를 가장 경악하게 한 것은 나치의 반유태주의 운동이었다. 그 잔혹성은 대규모 유태인 학살을 통해 드러났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태인들은 모든 전문직에서 쫓겨났고, 자신이 유태인임을 밝히는 증명서를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몇 가지 특정한 이름만 사용해야 했다. 그들은 극장이나 수영장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독일의 유태인들은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유태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기업과 재산을 빼앗고, 유태교 교회를 불태우던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해서는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1939년 국회 연설에서 이미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태인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123위대한 생각들]


• 학자 우대는 여러 면에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먼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연구하여 발표할 수 있었고, 그 생각이 충분히 깊고 현실적이면 일약 재상으로 임명될 수도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학문의 흥성과 발전을 가져왔다. 다음으로 학자 우대는 신분제의 교란을 더욱 촉진시켰다. 노예 출신이든 장사꾼 출신이든 학문에 조예가 깊으면 누구나 대접을 받고 출세할 수 있었다. 귀족들만 잘 나가던 시절은 이제 "아! 옛날이여"가 되어 버렸다.[143위대한 생각들]


•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는 3,000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학문에 능통한 사람만도 7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제자들 가운데 귀족의 자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상인, 빈민, 농민 등 평민 출신이었다. 공자에게 이렇게 많은 제자가 모여든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공자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평민들도 제자로 받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공자는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아주 적은 수업료만 요구했다. 당시에 학문이란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학문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는 생각이 달랐다. 공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속수(지금으로 치면 명태 열두마라로, 가르침을 청하는 데 쓰는 가장 적은 예물)의 예 이상을 치른 사람을 내가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다." - 《논어》〈옹야〉편[144위대한 생각들]


• 공자는 예의정치가 실현된 세상,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대도(大道, 큰 진리)가 행해지면 천하에 공의(公義, 사회정의)가 구현된다. 현명한이를 지도자로 뽑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직을 주며, 신의와 화목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으로 하여금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하고, 장년은 일할 여건이 보장되며, 어린이는 길러 주는 사람이 있고,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홀아비를 돌보며, 병든 자도 모두 부양 받는다. 남자는 남자의 일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일이 있다.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사적으로 저장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노동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헤치려는 음모가 생기지 않고, 도적이나 난적(亂賊)도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깥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 이런 사회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152위대한 생각들]


• 공자의 사상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은 공자보다 약 100년 뒤에 살았던 맹자이다. 공자와 달리 맹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맹자에 대한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신빙성 높은 것은 그가 기원전 372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289년에 죽었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고, 이름 대신 부르는 일종의 별명인 자(字)는 거(車)였다. 거는 수레이다. 맹자는 평생 수레를 타고 천하는 돌아다녔다. 전국시대라는 난세에 태어난 맹자는 공자와 같이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펴기 위해 중국 전역의 왕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뜻을 들어주는 권력자가 없어 공자처럼 제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맹자》이다.[152위대한 생각들]


• ...... 맹자의 사상에는 혁명을 인정하는 주장이 있다. 혁명을 뜻하는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은 사회를 한 바뀌 돌리는 것을 뜻한다. 사회 전체의 위아래를 뒤바꿔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한자어 혁명(革命)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혁'은 바꾼다는말이도, '명'은 천명(天命)을 뜻한다. 본래 천자는 하늘의 아들로서 하늘의 명령, 곧 천명을 받아 천하(天下)를 다스린다. 그런데 혁명이란 천명을 바꾸는 것, 곧 왕을 바꾸는 것을 가르킨다. 그럼 언제 왕을 바꾸는가? 맹자는 왕이 어질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민심을 잃었을 때 혁명을 한다고 했다. 물론 맹자는 서구에서 말하는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도 공자처럼 벼슬을 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학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같은 혁명론을 주장했을까? 그건 한마디로 "잘못하면 갈아 치울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오."라고 왕에게 경고한 것이었다. 맹자의 말을 들어 보자.


"백성들이 가장 존귀하고 사직(社稷)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며,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치운다. 좋은 제물을 준비하여 때를 어기지 않고 제사를 올렸는데도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사직도 갈아 치운다.[155위대한 생각들]


• 맹자의 왕도정치가 실현된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맹자가 대략적으로 그린 모습은 이렇다.


"일정하 생업이 없으면서도 일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선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백성에게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일정한 마음이 없으면 멋대로 행동하여 나쁜 짓을 저지르기 쉽다. ...... 그러므로 훌륭한임금은 백성의 생업을 만들어 주어 위로는 부모를 섬길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풍년에는 종신토록 배부르게 먹고, 흉년에는 죽음을 면할 수 있어야 한다. ...... 다섯 이랑의 집 둘레에 뽕나무를 심으면 쉰 살 된 사람이 비단 옷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번식시킬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면 일흔 살 된 사람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 등을 일으켜) 백 이랑의 밭에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않는다면 여덟 식구의 갖고이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학교 교육을 근엄하게 실시해 효성과 우애의 뜻을 되풀이해 가르친다면 백발 노인이 무거운 것을 이고 지고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다.[156위대한 생각들]


•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가들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 그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했다. 그들의 사상은 한마디로 '절대 자유를 추구한 사상'이다. 또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도피사상', '은둔의 사상'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도가는 유가와 뚜렷이 대비된다.[170위대한 생각들]


•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사상을 우리는 도가라고 부른다. 그들의 사상이 '도(道)'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도가 사상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라는 개념은 알쏭달쏭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도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것은 무엇'이라고 범위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다 '나무' '빵' 같은 이름을 붙이면 우리는 곧 지칭하는 것을 떠올린다. '여름에는 푸르고 얼기설기 가지가 있고', '배고플 때 먹으면 좋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곧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는 범위를 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仁)이나 의(義) 같은 것은 도가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일 경우에 '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직접 읽어 보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지어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노자는 도를 무(無)라고 표현한다. 원래는 무는 유(有)의 대립어이기 때문에 소유를 부정하는 말로 쓰이기는 했어도 존재를 부정하는 개념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무는 일체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상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일 따름이다. 상대적이라는 것은 절대적이라는 말이고, 또 무한정의 힘을 갖는다는 의미이다.[173위대한 생각들]


• 우리는 보통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어서 힘을 키우기도 한다. 노자는 이런 생각에 반대한다. 다른 사람을 '힘'으로 이기는 것을 '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은 약하다. 그러나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위를 뚫고 철을 뚫는다. 따라서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고 약한 물이 진짜 강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가 말한다. "가장 선(善)한 것은 물과 같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강한 것을 이긴다."


우리는 보통 텅 빈 것보다는 꽉 찬 것을 좋아한다. 집 안을 가구와 가전제품으로 채우고 머릿속을 지식으로 채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노자는 빈 곳을 중요시한다. 집에 사람이 살 수 있으려면 빈 곳(공간)이 있어야 하고 물 잔이 쓸모 있는 이유는 물을 담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또 수레바퀴에서 중요한 곳은 바퀴살들이 아니라 그 바퀴살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이 공간으로 인해 바퀴가 자기 역할을 하여 수레가 굴러 갈 수 있는 것이다.[175위대한 생각들]


• 노자는 깊은 덕을 가진 사람을 들어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음에 덕을 깊이 간직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다. 벌, 전갈, 독사도 쏘지 못하고 맹수도 덤벼 들지 못하며 사나운 새도 할퀴지 못한다. 뼈는 연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손아귀의 힘은 강하다. ........ (중략) ......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음양의 조화가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181위대한 생각들]


• 이 같은 무간섭의 정치야말로 노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정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의 정치란 발버둥친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통치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백성에게 해가 될 따름이다. 마치 수렁에 빠진 소처럼 스스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백성은 더욱 깊은 고통에 빠지고, 세상일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왕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왕노릇이다.


이처럼 지배자가 백성의 삶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것이 '무위(無爲)의 정치'라고 한다. 이 주장은 사실 당시의 지배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지배자들은 군비경쟁과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고, 백성은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당시의 정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위의 정치를 주장한 것은 전쟁의 폭력을 일삼는 왕을 비판한 것이고, 그들의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무위의 정치론은 유가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와 개혁에 대한 비판이었다.[183위대한 생각들]


• 공자가 대동세계(大同世界)를 꿈꾸었던 것처럼 노자도 자신의 사상이 제대로 구현된 세상을 꿈꾸었다. 노자의 이상향은 '작은 나라'이다. 인구가 적고 서로 왕래도 거의 없는 소박한 나라.


"작은 국가에 얼마 안 되는 백성, 이것이 우리들의 이상향이다. 백성들에게 무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도록 하고, 또 백성들에게 생명을 중히 여기게 하고 먼 곳으로 이주해가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나가는 사람이 없고, 크고 작은 갑옷과 투구가 있더라도 그것을 입고 전쟁을 하는 사람도 없게 된다.


백성들로 하여금 원시로 되돌아가 문자 대신 새끼를 꼬아서 뜻을 전달하게 한다. 백성들은 스스로 만든 요리를 맛있어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스스로 짠 옷을 자신 있게 껴 입고, 내집에 살면서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옛날부터 해온 것들에 만족한다. 손을 이마 위에 얹으면 코 앞에 보이는 이웃 나라의 닭이 시간을 알리는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184위대한 생각들]


•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도입되어 정착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불교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낯선 사상이었다. 그런데 도가가 그 생경함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핵심개념인 '공(空)'을 노자의 장자의 '무'를 통해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도가는 불교가 막 수입되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가 사상은 오늘날 더욱 주목받고 있다. 도가 사상에 들어 있는 문명 비판과 생태주의, 여성주의는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대안 사상의 씨앗으로 조명되기도 한다. 도가는 삶에 찌들어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고, 늘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제공한다. 또 세상의 경쟁에서 밀려 울고 있는 약자와 패배자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전해 준다. 나아가 사회의 주류 사상이나 질서를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철학이 되어주기도 한다.[189위대한 생각들]


•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 낯선 사상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생각과 문화가 묻어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재창조했다. 인도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정착하기까지는 거의 1,000년이 걸렸다. 인도불교는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중국의 불교로 재창조되었다. 그 세 단계를 의탁 불교, 격의 불교, 본의 불교라고 부른다.


초기인 의탁 불교시대에는 중국 도교의 한 파로 이해되던 시기이다. 이 때 불교는 도교의 양생호흡법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격의 불교 시대에는 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이때에도 도가의 개념을 빌려서 '공'을 이해하는 한계가 있었다. '연기(緣起)'와 동일한 '공'을 노자의 ''무'나 장자의 '소요'와 비슷한 의미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본의 불교 시대에 와서야 중국인들은 비로소 불교를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공을 연기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천태(天台), 화엄(華嚴), 선불교(仙佛敎)등 우리에게 전해진 중국 불교는 1,000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새롭게 창조된 중국의 불교이고 그 과정에서 도가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했다.[194위대한 생각들]


• 한비자는 맹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느니, 순자처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느니 하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그런 논의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설사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 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이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돈을 중심으로 뱅뱅 돌고 있다. '돈'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생기고, '돈' 때문에 모두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본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202위대한 생각들]


• 법가의 주장은 냉정하다. 사람들은 이 진실 때문에 법가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을 좀 꺼림칙해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 노골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 앞에 서면 왠지 알몸이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법가의 주장을 싫어한다. 유가는 법가를 '아비어미도 몰라보는 불한당'이라고 욕했고, 도가는 법가를 '권력의 화신'이라며 공격했다.[203위대한 생각들]


• 한비자는 이런 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하늘의 뜻이니, 점이니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의 일은 모두 인간이 하는 것이고, 모든 일의 결과는 인간의 행동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가는 일체의 미신을 배격한 합리주의 사상이었다.[205위대한 생각들]


•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모르는 자는 반드시 옛법을 변경하거나 관습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군(聖君)은 변경할 만한 일이라면 변경해도 좋다. 그렇지 않은 일이라면 영구히 옛것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변경하고 변경하지 않은 것에 구애를 받지 말아야 한다. 단지 나라를 다스려서 백성이 행복하게 되는 일이라면 옛 관습을 그래도 따르고, 새로운 관습을 기르는 것이 좋다면 새 사업을 일으키는 것이다.


요컨대 군주는 백성의 행복이 될 만한 것을 중심으로 해야 하므로 반드시 옛것을 그리워할 것도 없고, 꼭 새 사업을 일으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옛것 가운데 변경해서도 안되는 것이 있고, 오랫동안 내려온 관습 가운데도 변경해야 할 것이 있으므로 그 결과를 잘 생각해 결정하면 좋을 것이다."[206위대한 생각들]


• 마키아벨리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나 나의 의도는 독자에게 유익한 것을 쓰려는 것이다. 쓸데 없는 사변을 노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공화체제나 군주 체제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상상이 대체 무엇에 소용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와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 때문에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현실을 놓친다면 이는 자기 보존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에 빠트리는 것이다." ―《군주론》[207위대한 생각들]


• "법을 실행할 때는 신분이 귀하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는다. 비록 신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법을 위반하면 즉시 제재를 가한다. 이것은 마치 먹줄을 쓸 때 굽은 곳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맞추어 먹줄을 굽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혜가 있는 자도 법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법에 위배된 일은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정당화되지 않으므로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법 앞에서는 동등한 것이다. 또 용감한 자가 그 용기를 믿고 다투어보아도 결코 법을 굽힐 수는 없다. ―《한비자》[212위대한 생각들]


• 한비자의 입을 통해 우리는 법가에서 주장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정치는 '예의 정치'이고 노자가 주장한 정치는 '무위의 정치'이다. 이에 비해 한비자나 상앙이 주장한 정치는 '법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 상앙, 이사 같은 사상가들을 법가라고 부르는 것도 그들의 핵심사상이 '법'이기 때문이다. 노자, 장자의 핵심 사상이 '도'이기 때문에 그들을 '도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12위대한 생각들]


• "군주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고 싶다든지 이런 것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신하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만약 군주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고 좋고 싫은 것을 밝히면 신하는 마음에 그대로 말하지 않고 군주의 마음에 영합하도록 꾸미게 된다. 또 군주는 자기의 의사를 말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여러 의견을 귀담아 듣도록 한다. 만약 군주가 의견을 말해 버리면 신하는 군주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해서 그 뜻에 영합한 것만 보여주게 된다.


월나라 왕이 용맹을 좋아하자 백성들 가운데 서로 죽겠다고 나서는 자가 많았고, 초나라 영왕이 허리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나라 안의 여자들이 영왕의 마음에 들고자 다투어 밥을 굶었다. 제나라 환공은 질투심이 강하고 여색을 좋아했다. 그러자 수조라는 자가 스스로 거세해 내시가 되었다.(이자는 훗날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은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역아라는 자가(환공이 아직 못 먹어본 고기를 맛보게 하려고) 자기의 장남을 삶아서 바쳤다.(이자도 역시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한비자》[213위대한 생각들]


•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데는 일곱 가지 술책이 있고, 신하의 간사함을 살피는 데는 여섯 가지 기미가 있다. 첫째, 여러 신하의 말을 서로 비교 검토할 것, 둘째, 죄 지은 자는 반드시 처벌해 군주의 권위를 밝힐 것, 셋째,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포상해 그들의 능력을 다하게 할 것, 넷째, 신하의 제안을 밝고 정확하게 결정하고, 일일이 그 실적을 확인해 문책할 것, 다섯째, 때로는 의심스러운 명령을 내려 신하를 시험하되 그 실력을 측량할 것, 여섯째, 군주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어도 모르는 척하며 신하에게 물어 볼 것, 일곱째, 일부러 말을 거꾸로 하고 일을 반대로 해서 신하를 시험할 것, 이상 일곱 가지는 군주가 반드시 사용해야 할 방법이다.―《한비자》[215위대한 생각들]


• 엄정하던 신분제도는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거치면서 무너져 내렸다. 이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위 공직에 임명되었다. 노예 출신이건 농부건 상관없었다. 귀족과 일반 백성을 구분하는 것은 전처럼 큰 의미가 없었다. 또한 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은 왕권이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힘이 약화된 귀족들을 왕이 힘으로 제압하기에 이른 것이다.[217위대한 생각들]


• 법가 사상을 기반으로 중국이 통일된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공자가 그리워했던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도로는 광대한 중국 전역을 단일하게 통치할 수 없었다. 통치의 합리적인 기준(법)을 설정하고, 일사분란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며, 정책 집행 결과에 대해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전국을 통치하는 기술, 방법, 철학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은 법가 밖에 없었다.[217위대한 생각들]


• 또한 법가 사상은 세상을 파악하는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어쩌면 세상이란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무한 경쟁을 벌이는 냉혹한 곳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살이에는 사랑, 정, 믿음 같은 도덕이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법가는 이를 무시한다. 더욱 큰 문제는 법가 사상에는 냉혹한 세상을 훈훈하게 바꿔보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이란 냉혹하니까 그것을 철저히 인정하고 활용하자는 생각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주된 기능은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을 이끄는 것이다. 유가와 다르게 법가의 사상에는 이것이 없다.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안주할 뿐이다.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보려는 것도 사실은 그 극복 방법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법가에서는 그것이 없다. 다만 군주의 편에 서서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220위대한 생각들]


• 한비자는 다양한 학파의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각각의 장점을 취해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구축했다. 스승 순자로부터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 예의정치 사상 등을 받아 들였고 신불해와 상앙 등으로부터 부국강볍의 정치술, 노자와 장자로부터 무위의 정치술과 우민정치사상 등을 섭취했다. 이 같은 한비자의 사상은 《한비자》에 온전히 담겨져 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한비자》는 20권 5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222위대한 생각들]


•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내가 귀양이 풀려서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 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이다. 사람이란 때로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만 귀양이 풀려 집에 돌아가느냐, 못돌아가느냐 하는 작은 일에 잽싸게 다른 사람에게 꼬리 흔들며 애걸하고 산다면, 만약 나라에 외침이 있어 난리가 터질 때 임금을 배반하고 적군에 투항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229위대한 생각들]


• 다산 정약용, 그는 지금부터 약 240여 년전에 태어난 조선의 대학자요, 사상가요, 걸출한 시인이다. 일찍이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정약용을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했다. 정약용은 약 10여년의 벼슬 생활과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503권의 책과 2,500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가 연구한 분야는 방대하기가 그지 없다. 역사와 철학, 법률과 정치는 기본이고 천문과 지리, 언어와 시, 건축과 기계, 의학과 음악 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분야 가운데 빼놓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방대한 분야를 연구하고 저술할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르게 한다. 조선의 실학(實學)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는 정약용, 그는 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유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약용을 통해 우리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된 유가 사상이 조선 후기에 들어 얼마나 민주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발전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다.[230위대한 생각들]


• 그 시대에는 세 가지 정책(三政), 곧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이 농민 수탈의 대명사였다. 전정은 백성들에게 거둬들이는 토지세이고, 군정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 양민에게서 거둬들이는 국방세였다. 조선 시대의 법에는 양반과 노예를 제외한 일반 백성은 일정 기간 군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실제로 그럴 수 없어서 대신 세금을 낸 것이다. 환정은 봄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국가는 이 세가지 정책을 통해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했다. 삼정은 국가재정의 골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정의 집행이 제멋대로였다는 것이다. 돈과 인맥을 통해 관직을 얻은 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재산을 모으는 것이었고, 이들은 바로 삼정을 이용해 부당하게 재산을 축적했다.[236위대한 생각들]


• 통치자가 민중을 위해 있는가? 민중이 통치자를 위해 있는가? 민중은 곡물과 옷감을 내어 통치자를 섬기고, 수레와 종들을 내어 통치자를 맞이하고 보내며, 자신들의 고혈과 골수를 짜서 통치자를 살찌워주니 민중이 통치자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통치자가 민중을 위해 있는 것이다.


먼 옛날에는 민중뿐이었지 어찌 통치자가 있었겠는가? 민중은 순박하고 평화롭게이여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 결정을 짓지 못했다. 마을에 공정한 말을 잘하는 어른이 한 명 있어서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어른에게 복종하여 그를 이정(里正)이라고 불렀다.


여러 마을의 민중이 서로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한 어른이 준수하고 지식이 많았기에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다.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어른에게 복종하여 그를 당정이라고 불렀다. 여러 지역의 민중이 지역간의 분쟁을 결정짓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어른이 현명하고 덕이 있기에 그들은 그 어른에게 가서 판결을 받았다.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두 복종해 그를 주장이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은 사정과 절차에 의해 여러 주의 대표들이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대표로 삼고 제후라고 불렀고, 여러 국의 대표들이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대표로 삼고 방백이라고 불렀으며, 사방의 방들은 한 사람을 따르고 존경해 으뜸으로 삼아 황제라고 불렀다. ―《통치자론》[242위대한 생각들]


• 정약용이 유배 생활중에 읊은 시이다.


"어렸을 때는 성인을 배울 생각을 했고 중년에 들며 점차로 현인이라도 바랐어라. 늙어가며 우하(愚下)도 달게 여겼지만 근심에 싸여서 잠들 수 없어라.


한 알의 야광주가 장삿배가 실렸다가 바다 복판서 바람 만나 가라앉으니 만고에 그 빛을 낼 수 없어라.


취해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 울음소리 푸른 하늘 끝까지 닿았네. 옆 사람들 내 뜻을 알지 못하고 내 한 몸 궁박해서 운다고 하네.


술 취해 정신 없는 사람들 속에 몸가짐 단정한 선비가 있네. 모두들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이 사람만 미쳤다고 몰아세운다네. ―《근심에 싸여》[247위대한 생각들]


• 당시에 논의되었던 토지제도 개혁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정전제(井田制)와 균전제(均田制)이다.


첫 번째로 정전제의 '우물 정(井)'자는 정전제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정사각형인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나누어 보자. 분할된 토지는 모두 아홉 조각이 된다. 정전제는 이것을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그 속에서 세금 문제를 해결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아홉 조각 가운데 여덟 조각은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가운데 한 조각은 공전으로 한다. 농민들은 각자 자기에게 분재된 땅을 경작하는 동시에 서로 힘을 합해 가운데 있는 공전을 경작한다. 그리고 공전에서 나오는 생산물로 세금을 충당한다. 정전제로 중국 주나라 때 실시된 적이 있는 토지제도이다. 유가에서는 이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보았기 때문에 토지제도 개혁 문제만 나오면 항상 정전제가 거론되었다.


두 번째로 균전제는 정약용이 스승으로 모신 성호 이익이 제안한 제도이다. 균전제는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자'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토지 소유의 집중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이렇다. 국가가 한 가구에서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기준을 작성한다. 모든 가구는 그 제한된 토지, 곧 영업전을 소유할 수 있다. 이 영업전은 모슨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팔 수 없지만 그 외의 토지는 마음대로 사고 팔수 있다. 이렇게 하면 모든 농민이 균등하게 토지를 가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토지개혁론》에서 위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며 자신의 토지개혁론인 '여전제'를 주장한다.


"농사짓는 사람이 토지를 갖게 하고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면 여전제를 시해행해야만 한다. 여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산골짜기 냇가의 지형을 따라 경계를 긋고 그 경계의 안을 여(閭)라 한다. 세 개의 여를 이라 하고, 다섯 개의 이를 방, 다섯 개의 방을 읍이라 한다. 여에는 대표인 여장을 둔다.


한 여의 토지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경작하며, 이 구역이니 저 경계니 하는 것 없이 오직 여장의 명령만 듣게 한다. 여장은 사람들이 하루 하루 일한 내용을 장부에 기록해 둔다.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곡식을 여장의 강당으로 실어 나른 후, 먼저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여장의 노임을 준다. 그리고 나머지 곡식을 가지고 날마다 일한 것을 기록한 장부와 대조해서 사람들에게 분배한다.―《토지개혁론》[250위대한 생각들]


• 정약용은 이 같은 토지제도를 근거로 몇 가지 다른 제도 개선책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그는 놀고 먹는 선비(양반)들이야말로 사회의 큰 병폐이며,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비들도 농사를 짓거나 상업, 수공업등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글을 언제 읽느냐는 항변에 정약용은 일을 마치고 밤에 집에 들어와 읽으면 된다고 대답한다.[251위대한 생각들]


• 정약용은 개혁적이고 실천적인 유가였다.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입한 최고의 학자였지만 그의 학문은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공허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현실을 개혁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적극 참여한다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조선 후기에 가장 온전하게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다.[258위대한 생각들]


• 정치부패, 사회 기강의 문란, 민중의 소요는 양심 있는 양반들 사이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다.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흐름을 이끈 사람들은 주로 권력에서 밀려난 양반이나 몰락한 양반들이었다. 그런 흐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실학이다. 실학은 실사구시학의 준말로 본래 뜻은 '실제적인 사물에서 그 진리를 탐구하다.'는 것이다. 이는 청나라 고증학의 학풍을 뜻하는 것인데 조선에서는 여기에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그래서 실학을 목표로 삼고 학문을 한 사람들은 농업, 상업, 수공업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김정희 등이다.[263위대한 생각들]


• 전봉준은 법관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마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벌을 받지는 아니하리라.[269위대한 생각들]


• 전봉준을 사형을 담당했던 한 관리가 감동하여 후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전봉준이 처음 잡혀 오던 날부터 끝내 형을 받던 날까지 그의 전후 행동을 잘 살펴 보았다. 그는 과연 풍문으로 듣던 말보다 훨씬 돋보였다. 그는 외모로부터 뛰어난 인물이었다. 청수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가졌고, 엄정한 기상과 강한 심지는 세상을 한 번 놀라게 할 만한 큰 위인, 큰 영걸이었다. 과연 그는 평지돌출로 일어서서 조선의 민중운동을 대규모로 만든 자이니 그는 죽을 때까지도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본심 그대로 태연히 간 자이다.[270위대한 생각들]


•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고 조선은 다시 300년에서 500년 뒤에 멸망하여 이어서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들어선다는 줄거리이다.


백성들 사이에는 삼국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륵 신앙도 널리 퍼져 있었다. 미륵 신앙에서 '미륵'은 현재 도솔천에 살고 있으나 약 56억 7천만년 뒤에 지상 세계로 내려와 현재의 석가모니불을 대신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래불이다. 미륵은 염부제 (중생이 살고 있는 지상 세계)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에 걸쳐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설법을 행하는데 이 때 일반인들도 이 설법에 참가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백성들 사이에 새롭게 퍼져 나간 사상으로 '후천개벽'사상을 들 수 있다. 이는 오전과 오후가 번갈아 오듯 우주의 시간도 선천과 후천이 있어 서로 순환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지금의 운수는 선천 시대가 막을 내리고 후천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가진 자의 탐욕과 부패, 수탈과 착취, 약한 자의 설움과 분노는 선천 시대와 함께 막을 내리고, 새로 열리는 후천시대는 사랑, 평등, 평화의 세상이다. 후천이 열리면 질병도, 관리의 수탈도, 여성에 대한 억압도 사라져 모두가 신선처럼 살 수 있는데 바로 지금 그 하늘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 이 사상의 요지이다.[276위대한 생각들]


• 동학사상 가운데서 백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평등사상이다. 동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늘과 같아질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하늘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하늘의 마음은 곧 사람의 마음이다.(天心卽人心) 1대 교주 최제우
하늘과 사람은 똑 같다.(天人如一) 2대 교주 최시형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3대 교주 손병희


이런 평등 사상은 당시 민중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농민들의 봉기를 지지해 주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지배층에게는 이 같은 동학이 사회질서, 곧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사악한 주장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교조 최제우는 결국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죄로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동학은 불법이 되었다.[279위대한 생각들]


• 농민군이 형성되자 이들의 행동을 통일해야 했다. 어제는 흙 파먹고 사는 농투성이였지만, 오늘은 국가를 보위하여 백성을 보살필 신성한 의무를 띤 '의병'이므로 규율이 필요했다. 농민군의 행동을 엄격히 할 '농민군 4대 행동강령'이 발표되었다.


1.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 먹지 마라.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 권세 있는 관료)들을 모두 없앤다.[286위대한 생각들]